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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원칙 어기고 기업에 규정 지키라는 보건당국

입력 2017-10-24 09:38 수정 2017-10-24 10:54

바이오스펙테이터 천승현 기자

국내에서 제약사가 개발한 신약이 건강보험을 적용받으려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시판승인 이후에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급여적정성 평가를 받고 건강보험공단과 약가협상을 거쳐 보험급여 적용 여부와 보험약가가 결정된다.

심사평가원과 건보공단의 업무가일부 중복된다는 원성이 제약기업들로부터 제기되지만 국민 건강과 직결된데다 국민들이 낸 건보료를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명분에서 엄격하게 제도를 운영한다. 지난 2006년 약품비를 줄이기 위해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시행되면서 약가협상 제도가 도입됐다.

최근 보건당국이 아스트라제네카의 항암제 ‘타그리소’의 약가협상 과정에서 협상기한을 2차례 연장한 결정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약가협상 기간은 보건복지부장관이 협상을 명한 날의 다음 날부터 60일간으로 규정됐다.

당초 타그리소의 약가협상 마감날은 지난 13일이었지만 건보공단과 아스트라제네카는 절충안을 찾지 못하고 20일에 추가 협상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지난 20일까지도 타결짓지 못한채 협상을 중단하고 오는 11월7일까지 추가 협상을 진행키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약가협상을 중단하고 추후 재개한다는 형식이지만 사실상 협상 기간이 당초 마감시한보다 20일 이상 연장된 것이나 다름 없다.

사실 타그리소의 약가협상 난항은 어느 정도 예견됐다. 타그리소와 같은 시기에 약가협상이 시작된 한미약품의 ‘올리타’가 예상보다 낮은 가격을 제시하는 전략으로 일찌감치 타결된 영향이 컸다.

비록 올리타는 국내 2상시험만 마치고 조건부 승인을 받았고, 타그리소는 글로벌 임상3상을 완료한 약물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2개 약물 모두 ‘이전에 EGFR-TKI로 치료 받은 적이 있는 T790M 변이 양성 국소 진행성 또는 전이성 비소세포폐암 환자의 치료’라는 동일한 적응증으로 승인받고 동일한 시기에 협상을 시작한 만큼 직간접적으로 서로 비교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올리타가 타그리소의 제시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협상이 타결된 터라 보건당국 입장에선 올리타의 약가를 무시하고 타그리소의 적정 약가를 산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됐다. 대체 약물이 있는데도 비싼 가격으로 등재하면 보험재정 절감 기회를 외면한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아스트라제네카 입장에서도 억울한 처지인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경제성평가에 근거해 협상 제시가격을 산정했는데 임상3상시험을 마치지도 않은 유사 약물의 가격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해외보다 큰 폭의 가격인하를 수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본사의 승낙을 받아내기도 힘들다.

▲아스트라제네카의 '타그리소'

약가협상 기간이 2차례 연장됐다는 사실만으로 문제삼기는 어렵다. 약가협상 지침을 보면 ‘복지부장관이 협상 명령시 협상기간 또는 협상기한을 별도로 명시한 경우 그에 따른다’라는 규정이 있다. 복지부장관의 의도에 따라 협상기한 연장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2차례 협상 기간 연장은 2006년 약가협상 제도가 도입된 이후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형평성 논란이 불가피하다. 협상기간 마감 이후 추가로 협상이 진행되는 사례가 있었지만 대부분 하루 이틀 정도의 막바지 조율 기간만 주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약가협상 기간이 연장될 수도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 못한채 협상결렬을 수용한 기업들도 많다고 한다.

60일, 1440시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서로의 입장을 확인했는데도 절충안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20일 넘게 협상기한을 늘리는 것은 다른 기업들과의 형평성 문제를 노출한다.

매년 약가협상 제도가 도입된 이후 협상이 결렬돼 국내 시장 진출이 불발되는 사례가 속출했다. 약가협상 대상 중 협상 결렬로 급여권 진입이 좌절된 제품은 10% 안팎에 달한다. 약가협상 결렬로 국내 시장을 포기하는 비율이 10% 가량에 이른다고 보면 된다. 타그리소의 2차례 약가협상 연장을 두고 업계에서 특정 기업 봐주기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보건당국 입장에서도 타그리소의 약가협상 결렬시 타그리소의 저렴한 공급을 기다렸던 환자들로부터 원성을 들을 수 있어 협상결렬은 부담스러운 결정일 수 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가 보장성 확대를 천명한 상황에서 협상결렬이 자칫 정부의 정책기조를 역행하는 것으로 비춰질까 우려했을 수도 있다.

보건당국의 협상 기간 연장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되는 또 다른 이유는 연장의 배경이 무엇인지, 협상 과정에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에서다. 협상 진행 중 협상 내용을 유출하지 않도록 협상지침에 규정됐다. 협상 종료 후 협상결과를 제외한 협상시 제출된 자료와 협상에서 논의된 내용을 공개해서도 안된다.

타그리소 뿐만 아니라 올리타는 약가협상 내용 중에 리펀드제도와 같은 환급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건보공단과 아스트라제네카가 추가 협상기간을 거쳐 타그리소의 약가를 결정했더라도 정확한 내용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다는 의미다. “보건당국이 비공개라는 장막 뒤에 숨어 특정 기업과 밀실 합의를 시도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조차 나오는 실정이다.

타그리소가 올리타와 같은 수준을 낮은 가격을 받아야 한다거나, 글로벌 수준에 근접한 높은 가격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보건당국은 타그리소의 높은 약가를 수용할만한 근거가 있으면 높은 가격으로 협상에 타결해주고, 그렇지 않을 경우 결렬을 선언하고 추후 재협상 절차를 밟아야 한다.

최소한 협상기간이 연장된 이유라도 공개해야 한다. 마치 시험 답안지 제출시간을 넘겼는데도 답안지 작성 시간을 추가로 부여하는 것 같은 인상이다.

그동안 협상결렬로 보험급여권 진입이 무산된 약제 중 환자들이 간절하게 공급을 기다렸던 제품도 많다. 하지만 보건당국은 환자들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건강보험 재정을 효과적으로 운영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기업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도 운영 과정에서 형평성 문제가 발생하면 해당 제도의 권위도 빈약해진다. 그동안 약가협상 과정에서 절충안을 찾지 못해 시장 철수를 선택했던 제약사들은 박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보건당국은 향후 약가협상에 임하는 제약사들에 협상 기한 준수를 강요하기 어렵게 됐다.

보건당국의 원칙에 어긋난 결정은 얼마 전에도 있었다. 보건당국은 지난 5월 노바티스의 리베이트 의약품의 보험급여 정지 처분을 결정하면서 백혈병치료제 ‘글리벡’의 처분은 과징금 대체를 허용하면서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글리벡이 이미 특허가 만료돼 대체 가능한 제네릭 제품들이 판매 중인데도 복지부 측은 "글리벡은약제 변경시 동일 성분 간이라도 적응 과정에서의 부작용 등 우려가 있고, 질환 악화시 생명과 직결된다는 전문가의 의견을 반영했다"라고 예외 규정을 적용했다.

글리벡을 복용 중인 환자들의 거센 저항이 당시 결정의 큰 요인으로 지목됐다. 백혈병환우회는 “글리벡에 대한 요양급여 적용 정지 처분을 했을 경우 글리벡 치료로 장기 생존하고 있는 수천 명의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들이 강제적으로 다른 대체 신약이나 복제약으로 교체하도록 강요받는 것은 비합리적이다”라며 글리벡 급여정지에 대해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결국 복지부는 ‘오리지널 의약품=제네릭’이라는 과학적 판단을 무시한채 사회적 논쟁을 피하기 위해 비과학적 결정을 내린 셈이 됐다. 최초의 리베이트 의약품의 급여정지 처분을 내리면서 원칙을 어기면서 제도의 신뢰도마저 흔들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앞으로 리베이트 의약품의 급여정지 처분이 예고될 때 대체약물이 있는데도 환자들이 급여정지를 반대하면 복지부는 어떤 결정을 내릴지 궁금하다.

물론 제도 운영과정에서 늘 균형잡힌 결정을 내리기는 힘들다. 하지만 특정 기업의 이익과 직결되는 사안이라면 더욱 냉정해야 하고 형평성을 유지해야 한다.

건강보험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보건당국은 국민들이 낸 건보료를 적절하게 사용하도록 결정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것이다. 보험급여나 약가결정 권한이 주어졌다고 기업들에 멋대로 칼자루를 휘둘러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얘기다. 정부가 입맛따라 원칙 어기면서 기업들에 규정을 준수하라고 요구할 자격은 없다. 국민들이 그러라고 건보료를 내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