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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암과 싸운 과학자들 『암 정복 연대기』

입력 2019-11-14 14:43 수정 2019-11-14 14:43

바이오스펙테이터 서일 기자

과학은 어떻게 만들어지며, 신약은 어떻게 태어나는가..지도 한 장 없이 전쟁터에 나아가, 암과 싸웠던 과학자들의 이야기

암과 싸우는 가장 큰 무기는 과학자의 매일 펼치는 평범한 용기

과학자의 대단함은 그들이 새로운 과학적 사실을 밝혀내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좀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주는 데에만 있지 않다. 과학자의 대단함은 자기 연구가 어떤 결과를 낼지 심지어 연구가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매일매일 연구를 이어간다는 점에도 있다. 이 책 『암 정복 연대기-암과 싸운 과학자들』에 이름이 한 번이라도 나오는 70여 명의 과학자들과, 무슨무슨 연구팀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소개된 더 많은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만성 골수성 백혈병을 치료해 표적항암제라는 개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글리벡(Glivec, 성분명: imatinib), 말기 유방암 환자들의 생명을 구하고 있는 항체의약품 허셉틴(Herceptin, 성분명: trastuzumab), 암 환자 진료 차트에 ‘완치’라고 적어도 되는 상황을 만들어주기 시작한 면역항암제 여보이(Yervoy, 성분명: ipilimumab), 옵디보(Opdivo, 성분명: nivolumab), 키트루다(Keytruda, 성분명: pembrolizumab)는 이들 70여 명의 과학자들과 이름 없이 등장하는 연구팀에 속한 과학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매일 분투한 결과다.

이들 가운데 자기 연구가 암을 고치는 기적의 약으로 마무리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의 거의 없었다. 과학자들은 그저 오늘도 연구할 뿐이다. 과학자들의 모험에 가까운 연구들이 우여곡절을 겪고 나면 생명을 구하는 약으로 태어난다. 그러니 암과 싸우고 있는 과학자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모험가이며 탐험가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한 명의 천재가 완성하는 것도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다

『암 정복 연대기-암과 싸운 과학자들』은 천재 과학자의 위대한 업적을 따라가거나, 빈틈없이 꽉 짜인 내러티브로 채워져 있지 않다. 오히려 그런 것들과 정확하게 반대다. 과학자들은 잘못 예측해 엉뚱한 연구를 하는데, 연구한 결과는 전혀 의외의 곳에서 성과를 낸다. 이런 일들이 30~40년 정도 쌓이다 마침내 암을 치료하는 신약이 세상에 나온다. 단일클론항체(monoclonal antibody)에 대한 사연이 대표적이다. 허셉틴이 세상에 나오는 과정에 중요한 기여를 한 단일클론항체 이야기다.

정상적인 세포는 정상적인 속도로 성장하고 사멸한다. 어떤 세포에 이상이 생겨 빠르게 성장하기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자라는 세포로 구성된 조직은 제 기능을 못 할 것이다. 또한 빠르게 성장하기만 하는 세포가 영양분을 빠르게 써버리는 탓에, 몸의 다른 곳에서 쓸 영양분은 부족해질 것이다. 암이라고 부르는 병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몸속 여러 기능의 조절은 분자 단위 단백질의 화학적인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성장하는 것도 세포 성장시키는 단백질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단백질에 분자 단위로 결합해 화학적인 작용을 막는 물질을 환자에게 투여하면 암은 멎을 것이다. HER2는 세포를 성장시키는 역할을 해, 암을 일으킬 수 있는 단백질이다. 유방암 환자 가운데 HER2 단백질이 지나치게 많이 생기는 환자가 있다. 그리고 HER2 단백질에 결합해 세포 성장을 억제하는, 분자 단위 물질인 항체로 만든 약이 허셉틴이다.

허셉틴이 항체의약품이라는 것은, 항체를 잘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몸속에는 무수히 많은 종류의 항체가 섞여 있다. 연구를 하려면 필요한 항체를 골라내고, 분석하고, 측정해야 하는데 어렵다. HER2 단백질이 문제라는 것을 알아도, 해결할 수 있는 항체를 분석할 수 없다면 치료 현장에서 활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단일클론항체는 한 가지 항원에만 반응하는 항체다. 이를 대량으로 만들어내야, 항체의약품 개발이 가능해진다.

호기심은 연구로, 연구는 기술로 버텨내는 시간과 우연한 만남은 신약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MRC-LMB(Medical Research Council/Laboratory of Molecular Biology)에서 연구하던 세자르 밀스타인(Cesar Milstien, 1927-2002)는 항체를 연구하고 있었다. 항체는 종류가 매우 다양한데,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항체가 만들어질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연구는 쉽지 않았다. 다양한 항체가 복잡하게 섞여 있는 혈액에서, 연구하기 위한 항체를 분리해서 모으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세자르 밀스타인은 B세포가 암이 된 골수종(myeloma)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얻은 골수종세포가 한 가지 종류의 항체만 만든다는 연구 결과를 알게 되었다. B세포는 항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는데, 암세포가 된 골수종세포도 계속 항체를 만들었다. 암세포는 사멸하지 않고 계속 증식하니, 단일한 항체를 많이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었다.

가능성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그 문으로 문제점도 따라 들어온다. 골수종세포가 만들어내는 항체가 단일했지만, 그 항체가 어떤 항원에 반응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연구자가 필요로 하는 항체도 아니었다. 즉 연구자가 필요로 하는 항체가 만들어지도록 골수종세포를 처리하는 방법이 필요했다. 세자르 밀스타인은 연구실에 들어온 게오르게스 쾰러(Georges J. F. Köhler, 1946-1995)와 함께 원하는 항체를 대량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밀스타인과 쾰러는 B세포와 골수종세포를 혼합해 이 가운데 단일한 항체만 만들어내는 혼종 세포(hybridoma)만 골라내는 방법을 찾았다. 단일클론항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밀스타인과 쾰러는 다양한 항체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연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단일클론항체를 만드는 방법을 찾은 것이었다. 물론 단일클론항체 기술이 암을 치료하는 데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 예측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연구를 했을 뿐이고, 그러다 허셉틴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이 책 『암 정복 연대기-암과 싸운 과학자들』에 나오는 거의 모든 이야기는 밀스타인과 쾰러가 단일클론항체 기술을 개발하고 쓰인 사정과 비슷하다. 수많은 과학자들은 이론을 증명하고, 물질을 찾아내고, 기술을 개발하는데, 이런 것들이 얽히고설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불러온다. 고대 이집트 파피루스에 나올 만큼 오래전부터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마땅한 대책이 없었던 암을 고치는 ‘기적의 치료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글리벡, 허셉틴, 여보이, 옵디보, 키트루다..과학자들이 만들어낸 가장 앞선 암치료제들

『암 정복 연대기-암과 싸운 과학자들』에 나오는 과학자들의 고군분투를 따라가다 보면, 암과 싸우는 전선의 맨 앞에 서 있는 표적항암제, 항체의약품, 면역항암제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된다. 과학을 이해하기 어렵다면, 앞뒤의 일을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복잡한 수학의 공식은 막무가내로 외워야 하지만, 공식이 나온 과정을 알게 되면 외우지 않고 이해하며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글리벡이 탄생하는 과정을 다룬 1부에서는 초기 과학자들의 암을 어떻게 예측했으며, 예측에 따른 가설을 증명하고 반박해 수정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생명과학 태동기부터 과학자들은 암과 싸우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하게 AIDS와 같은 질병의 치료법 등을 찾기도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현대 분자생물학의 기초가 쌓여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허셉틴이 탄생하는 과정을 살펴보는 2부에서는 현대 생명과학과 생명공학의 바탕을 이루는 주요한 이론과 기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엿볼 수 있다. 단일클론항체, 재조합 DNA 기술 등은 암과 싸우는 과정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의 이런저런 도전과 실패 속에서 확립될 수 있었다. 과학자들은 재조합 DNA 등의 문제 앞에서 생명과학 윤리를 고민하는가 하면, 역시 재조합 DNA 기술을 이용해 대량으로 저렴하게 치료용 인슐린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의 끝은 암 유전자가 일으키는 문제를, 재조합 DNA 기술로 만들어낸 항체로 해결하는 허셉틴의 개발이었다.

환자 자신이 가진 면역의 힘으로 암을 고치는 여보이, 옵디보, 키트루다 등 면역항암제의 탄생 이야기는 3부에서 다룬다. 면역은 생명과학 전공자들에게도 까다로운 분야다. 따라서 면역항암제의 탄생 이야기는 면역에 대한 기초적인 이론을 함께 설명하며 진행된다.

◆남궁석 지음 / 바이오스펙테이터 펴냄 / 113×188mm / 본문 346쪽 / 무선제본 / 2019.11.15. / 값 23,000원 / ISBN 979-11-960793-3-8 03470 / 구매 문의 : book@bi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