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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좋은 바이오텍에서 위대한 바이오텍으로』

입력 2024-10-24 09:24 수정 2024-10-27 10:26

바이오스펙테이터 서일 기자

'빅바이오텍' 버텍스와 리제네론서 찾아낸 '신약개발의 법칙'.."좋음과 위대함의 차이, 그 위대함의 실체는 무엇이고 어디에서 오는가?"

미국의 바이오텍 버텍스 파마슈티컬스(Vertex Pharmaceuticals) 구내 식당에는 사진이 한 장 걸려 있다. 알 수 없는 화학구조식이 그려진 발등 사진의 주인공은 낭포성 섬유증(Cystic fibrosis, CF)을 앓고 있는 환자다. 낭포성 섬유증은 희귀 유전병으로 폐와 기관지, 소화관 등에 끈적이는 점액이 쌓이는 증상이 나타난다. 끈적거리는 점액은 환자의 정상적인 호흡과 영양분 흡수를 방해하는데, 이로 인해 환자의 기대수명은 20대 정도에 그친다.

버텍스는 낭포성 섬유증 치료제 ‘칼리데코(Kalydeco, ivacaftor)’를 개발했다. 사진 속 주인공은 버텍스가 개발한 신약으로 생명을 구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칼리데코의 화학구조식을 발등에 문신으로 새기고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 둘레에는 칼리데코 개발에 참여한 신약개발 연구진이 자신들의 서명을 남겼고, 버텍스는 이를 액자로 만들어 자랑스럽게 걸었다. 이 장면은 신약을 개발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신약을 개발하는 바이오텍은 돈을 벌기 위해 움직이는 영리 기업이지만, 이들의 일이 가지는 가치는 매출과 영업이익과 시가총액만으로 계산할 수 없다. 생명을 구하고 삶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은, 환자와 환자 가족에게 감히 돈으로 매길 수 없이 귀한 가치다. 그런데 모든 바이오텍이 신약개발이라는 귀한 가치에 도전하지만 모두 성공하진 못한다. 바이오텍의 신약개발이 가장 활발한 미국을 기준으로 보면, 약 5000여 곳의 바이오텍이 있지만 1년에 신약으로 세상에 나오는 물건은 많아야 10개 남짓이다. 개발하기만 하면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구하고, 엄청난 부와 명예까지 얻을 수 있는 바이오텍의 신약개발. 그런데 왜 어떤 바이오텍은 신약개발에 성공하고, 어떤 바이오텍은 그렇지 못할까?

『좋은 바이오텍에서 위대한 바이오텍으로』는 이 궁금증에서 시작한다.

좋은 바이오텍에서 위대한 바이오텍으로

돈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돈이 꽤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버텍스와 리제네론 파마슈티컬스(Regeneron Pharmaceuticals)는 1980년대 후반,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연 바이오텍이다. 이 두 바이오텍은 2024년 초 나란히 시가총액 1000억달러를 넘어섰다. 시가총액 1000억달러는 전 세계적인 제약기업인 브리스톨-마이어스스퀴브(Bristol Myers Squibb, BMS)나 화이자(Pfizer)와 엇비슷한 수준이다. BMS와 화이자는 버텍스와 리제네론에 비해 규모, 매출, 역사 등 모든 면에서 적게는 몇 배, 많게는 몇 십 배가 큰 글로벌 제약기업이다. 그런데 버텍스와 리제네론은 이런 거대 기업들과 시장에서 비슷한 가치로 평가받는다. 버텍스와 리제네론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 정도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일까?

『좋은 바이오텍에서 위대한 바이오텍으로』는 버텍스와 리제네론이 어떤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그로 인해 어떻게 실패를 했는지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두 바이오텍도 분명히 보통의 바이오텍들과 비슷했을 것이다. 따라서 버텍스와 리제네론이 겪었던 실수를 찾아내고, 이들이 어떻게 실수를 극복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했다. 예를 들어 버텍스와 리제네론도 다른 좋은 바이오텍들이 빠졌던, 일종의 확증편향과 같은 함정에 빠졌다.

첨단 과학과 최신 기술을 바탕으로 아이디어와 가설을 세우고 이것을 입증해나가는 과정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떠나는 모험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는 길을 가는 바이오텍에는 자신의 과학과 기술에 대한 믿음, 아이디어와 가설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같은 확신이 왜곡되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확증편향에 빠지기 쉽다. 특히 과학을 열심히 하는, 좋은 바이오텍일수록 이런 함정에서 잘 빠진다. 그동안 기울여온 노력, 성실했던 연구, 자신의 가설과 아이디어로 신약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그리고 이미 투자한 비용과 시간에 대한 미련은 바이오텍이 편향된 행동을 하는 쪽으로 이끈다. 가설과 아이디어가 틀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실험을 피하고, 그 이외의 실험과 연구에 몰두하게 만드는 것이다.

버텍스와 리제네론 모두 이와 같은 덫에 걸렸지만, 긴 시간에 걸쳐 실패를 거듭하면서 마침내 빠져나올 수 있었다. 두 바이오텍의 탈출 비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좋은 바이오텍에서 위대한 바이오텍으로는 버텍스와 리제네론의 탈출 비법이 ‘좋은 과학을 위대한 과학으로 바꾸는 것’이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증명한다.

좋은 과학에서 위대한 과학으로,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신약개발도 바이오텍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사람에 대한 관찰에도 집중한다. 버텍스를 설립했던 의사이자 과학자 조슈아 보거, 그의 뒤를 이어 오늘의 버텍스를 디자인하고 구현한 제프리 라이덴의 생각, 판단,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버텍스가 왜 환자의 수가 적어 시장성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기 쉬운 희귀 난치성 유전병 치료제 개발에 뛰어드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버텍스의 사람들은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human immunodeficiency virus, HIV), C형 간염 바이러스(hepatitis C virus, HCV) 감염에 맞선 신약을 개발했지만 상업화에는 실패한다. 이렇게 버텍스는 보통의 성공과 보통의 실패를 오갔지만, 희귀 난치성 유전병인 낭포성 섬유증 신약개발로 옮겨가면서 위대한 바이오텍의 길로 접어든다.

리제네론을 이끌어 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좀 더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제넨텍(Genentech)은 유전자를 조작해 ‘인슐린을 분비하는 대장균’을 만들어낸 최초의 바이오텍이다. 제넨텍과 같은 바이오텍을 설립해 루 게릭 병 치료제를 개발하려고 했던 의사 출신 과학자 레너드 슐라이퍼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리제네론을 시작한다. 레너드 슐라이퍼는 과학에 미쳐 있던 젊은 연구자 조지 얀코풀로스를 영입해 루게릭병,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치료제를 개발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지만 보기 좋게 실패한다. 그리고 이들은 제대로 된 신약개발에 나서기 위해 거대 제약기업을 이끌었던 과학자 출신 경영자 로이 바젤로스를 영입한다. 이 세 사람은 그동안의 리제네론 신약개발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바꿔가며 자신들만의 신약개발 공정을 세워나간다.

『좋은 바이오텍에서 위대한 바이오텍으로』는 지극히 평범했던 과학자들이 모여, 보통의 바이오텍이 저지르는 실수와 오류를 겪지만, 결국에는 자신들만의 신약개발 공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그리고 보통의 좋은 바이오텍이 위대한 바이오텍으로 바뀔 수 있었던 전환점이, ‘과학을 제대로 그리고 미친 듯이 한다’는 아주 당연한 명제를 받아들이면서부터였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위대한 바이오텍에서 발견되는 과학자적 리더십

이 책은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는 것보다 어렵다고 여겨지는 신약개발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시작됐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연구실과 임상시험 현장에서 신약개발에 도전하고 있는 수많은 바이오텍의 구성원들, 그리고 앞으로 신약을 개발해낼 미래의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신약을 개발해 환자를 질병에서 구해내겠다는 선한 의지, 과학적인 성취를 이루기 위한 이들의 노력, 그럼에도 결코 짧지 않은 시간과 자원을 쏟아야 하는 위험하고 고단한 과정을 응원하는 것과 별개로, 이 모든 것은 실제로 신약을 개발했을 때 비로소 가치가 생긴다.

그리고 가치는 좋은 바이오텍이기만 해서는 곤란하며, 버텍스와 리제네론과 같은 위대한 바이오텍이 되어야만 만들어낼 수 있다. 저자는 위대한 바이오텍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과학자적 리더십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과학자적리더십을 갖추기 위한 조건을 나열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이 작업은 신약개발이라는 가치로운 일에, 바이오텍 투자라는 방식으로 참여하려는 이들의 의사결정에도 도움을 주고준다. 버텍스와 리제네론이 시작했을 때는 이미 제넨텍을 비롯한 유명 바이오텍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그리고 버텍스, 리제네론과 제넨텍 사이의 시차는 약 20여 년 정도였다. 마치 한국의 바이오 신약개발과 미국의 바이오 신약개발의 시차가 20년 정도 벌어져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현실적인 조건은 투자로 신약개발에 참여하는 이들을 주저하게 만든다. ‘한국에서 신약이 나올 수 있을까?’ ‘우리 바이오텍에 대한 나의 투자는 가치로운 행동일까?’ ‘어떤 바이오텍에 투자하고, 어떤 바이오텍을 피해야 하는 것일까?’ 투자를 앞둔 이들의 고민은 깊어지고, 투자를 받지 못하면 신약을 개발할 수 없는 바이오텍은 곤란해진다.

저자가 버텍스와 리제네론에서 찾아낸 신약개발의 법칙은 ‘바이오텍에 과학자적 리더십이 있는가?’ ‘바이오텍은 과학으로 신약을 개발하려는 비전과 미션을 구체적으로 선언하고, 비전과 미션을 내외부 구성원들과 강력하게 공유하며 지켜가고 있는가?’ ‘바이오텍은 온전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환자의 삶을 바꿔낼 수 있는 과학과 혁신만을 좇고 있는가?’과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이었다.

이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할 수 있는 바이오텍이라면 버텍스와 리제네론처럼 이미 위대한 바이오텍이거나, 앞으로 위대한 바이오텍이 될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이 책의 곳곳에서 밝히고 있는 위대한 바이오텍의 조건을 기억하고 있다가, 투자라는 의사결정 앞에서 하나씩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버텍스 구내식당에 걸려있는 사진.

◆김성민 지음 / 바이오스펙테이터 펴냄 / 140*215mm / 268쪽 / 2024.10.20. / 값 37,000원 / ISBN 979-11-91768-09-1 03470 / 구매 문의 : book@bi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