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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컨테이너에 들어간 식물학자』
입력 2019-12-24 16:29 수정 2019-12-31 09:36
바이오스펙테이터 서일 기자
최성화 서울대 교수는 식물학자다. 식물학자라고 하면 온실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며 지낼 것 같지만, 이들은 ‘먹는 문제’를 풀기 위한 고군분투에서 언제나 앞장서왔다. 인구의 증가를 식량 생산량 증가가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던 맬서스의 이론을 깬 것은, 다른 경제학자의 경제학 이론이 아니라 식물학자들의 연구였다. 노먼 어니스트 볼로그(Norman Ernest Borlaug, 1914~2009)라는 식물학자는 밀의 품종을 개량했다. 개량된 밀의 이름은 소노라 64호. 볼로그가 개량한 품종의 밀은 수확량이 좋았는데, 덕분에 적어도 수억에서 수십억 명의 인구를 굶주림에서 구해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볼로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노벨 생리의학상에는 식물학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좋은 벼를 만들고 싶었던 식물학자
볼로그가 수확량이 많은 밀을 개량했듯이, 소출의 좋은 품종의 쌀을 만들려고 했던 최성화는 바이오 의약품 신약개발로 연구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볼로그의 소노라 64호는 다른 밀에 비해 키가 작았다. ‘그렇다면 벼의 키도 작게 만들면 수확량이 늘어날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운 최성화는 애기장대라는 식물의 돌연변이 연구로 키와 관계된 유전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아낸 유전자는 DWARF5(DWF5). 이 유전자는 30cm 정도인 애기장대의 키를 5cm까지 줄였다. 연구를 더 해보니 DWF5 유전자는 키를 키우는 역할을 하는데, 여기에 돌연변이가 생긴 것이었다. 연구는 더 진행되었고 애기장대의 키를 작게 만드는 DWF12를 찾아냈다. 기대를 안고 DWF12를 벼에 넣었다. 역시나 벼의 키는 작아졌다. 그러나 소출은 늘지 않았다. 과학자가 매일 맞는 상황이며, 반전의 시작이기도 하다.
희귀병의 원인을 찾아낸 식물학자
DWF5와 DWF12는 식물의 콜레스테롤 합성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DWF5가 사람에게 나타나는 희귀 유전병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스미스 렘리 오피츠 증후군(Smith Lemli Opitz syndrome, SLOS)은 콜레스테롤 생합성에 문제가 있어 생기는 병이다.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콜레스테롤 합성에 문제가 있어 SLOS를 앓는 환자는, 뇌가 작은 소두증이나 손가락이 보통보다 많은 다지증, 정신지체와 발달장애 등을 겪는다. 최성화가 DWF5와 DWF12를 찾았을 때가 1998년이었는데, 아직 사람의 유전자 지도가 다 그려지기 전이었고 SLOS가 유전자 문제로 발생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 때였다.
진화의 과정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기로 했을 뿐 식물과 동물의 뿌리는 같다. 사람에게 있는 질병 관련 유전자 289개를 조사했더니, 139개가 애기장대에도 있었다고 한다. 애기장대의 키를 작아지게 만드는 돌연변이 유전자는 사람에게서는 SLOS 질병을 일으킨 것이었다. 원인을 찾았으니 SLOS를 고칠 수 있게 되었을까? 식물학자는 여기서 잠깐 멈추었다. 과학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려면, 연구실을 문을 열고 기업이 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시작할 수 없었고, 다음 이야기를 준비한다.
식물공장에서 항체 의약품 만들기
그는 지플러스생명과학이라는 회사를 차려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컨테이너로 된 식물공장에서 항체 의약품을 만들기 위한 연구다. 허셉틴, 키트루다처럼 유명한 면역항암제들이 바로 항체 의약품이다. 항체 의약품은 사람의 면역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항체를 의약품으로 개발한 것이다. 암이나 희귀 난치성 질환에 효능을 보여주지만, 기본적으로 가격이 비싸다. 유방암 환자를 대상으로 놀라운 치료 효과를 보여주는 허셉틴(Herceptin, 성분명: trastuzumab)으로 1년 동안 치료를 받으려면 환자의 상태에 따라 다르나, 많게는 수천만 원 가까이 들어간다. 건강보험을 적용받을 수도 있으나, 누군가 약값을 내야 한다는 점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값이라고는 하지만 부담스러운 액수인 것이 사실이다.
비싼 데는 이유가 있다. 항체 의약품은 높은 수준의 생명과학과 생명공학, 의학과 약학 연구의 결정체다. 연구개발과 임상시험에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비용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항체 의약품은 유전자를 조작한 동물세포를 대량으로 배양해, 이 동물세포가 만들어내는 항체 물질을 정제해서 만든다. 원하는 약을 만들어내는 동물세포를 배양하고, 약물을 정제하는 데 첨단 장비와 고급 인력이 필요하다. 개발과 생산에 모두 돈이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소출이 많은 품종의 벼를 만들려다 희귀 난치병 원인 유전자를 찾아낸 식물학자는, 이제 항체 의약품을 ‘비싼 약’에서 ‘기적의 약’으로 바꾸는 일에 도전하고 있다. 동물세포가 아닌 식물에서 항체 의약품을 만들기로 것이다. 환자 개인에게 최적화된 항체 의약품을, 컨테이너 한두 동 규모의 식물공장에서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 생명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환자 맞춤형 항체 의약품 물질을 찾아내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기에 상상해볼 수 있는 일이다. 한편 원래부터 환자의 수가 적었던 희귀 난치병의 경우도 마찬가지. 규모의 경제 때문에 많은 환자에게 처방하는 항체 의약품 생산을 중심으로 공장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조건에서, 거대한 규모의 공장이 소수의 환자를 위한 약을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그런데 항체 의약품을 환자 맞춤형으로 소량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도 컨테이너 한두 동에서 식물을 길러내고 정제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정도만으로 가능한다면, 항체 의약품은 비로소 ‘기적의 약’이 될 것이다.
과학자의 글쓰기
항체는 동물 면역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나, 식물에는 아예 없는 물질이다. 그런데 식물에서 항체를, 그것도 의약품으로 쓸 항체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안 되는 것을 되게 만드는 것이 과학이라면, 그는 충분히 과학을 하고 있다. 이미 식물에서 항체 의약품 허셉틴의 성분인 트라스투주맙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작은 책은 미완성 연구 프리젠테이션이다. 아이디어를 설계해 실험으로 만들고, 설계한 실험을 입증하고, 그것을 다시 현장에 적용할 수 있도록 상업화하는 데 필요한 공학적인 문제 해결 등은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진행하고 있는 것들을, 논문이 아닌 책이라는 그릇에 담아 대중과 소통하려 하려 한다. 과학과 사이비를 구분하는 기준이 반증 가능성이고, 완성된 과학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미완성임에도 공개하고 전문가가 아닌 대중에게도 보여주며 적극적으로 소통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눈으로 걸러낸 장밋빛 결과를 전문가의 언어로 포장해 내놓는, 과학 아닌 사이비에 우리 사회가 뒷통수를 맞은 경험은 여러 번이다. 그리고 한두 건의 일탈이라고 하기에는 손해가 너무 크다. 해당 분야 연구가 꽃을 피우기도 전에 선입견에 덧싸여 사라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연구에 대한 애정, 그 연구가 결국 풀어내고 싶은 문제에 대한 간절함은, 미완성의 연구 노트를 대중에서 프리젠테이션하게끔 이끌었다. 과학자가 글을 쓰려는 이유다.
한편 끊임없이 도전하는 식물학자의 연구 프리젠테이션을 듣다보면, 독자는 과학자가 왜 연구실을 나와 회사를 차리게 되었는지, 약의 성분물질을 만들어내는 것과 실제 환자에게 처방하는 의약품이 되는 것 사이에 있는 규제과학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전 세계가 고도화된 도시들을 매개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는 상황에서 사스나 메르스 같은 유행병에 대응하는 차원의 식물 기반 백신 생산 시스템이 필요한 이유 등도 함께 들을 수 있다.
◆최성화 지음 / 바이오스펙테이터 펴냄 / 113×188mm / 본문 132쪽 / 무선제본 / 2019.12.13. / 값 10,000원 / ISBN 979-11-960793-5-2 03470 / 구매 문의 : book@bi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