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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또 리베이트
입력 2016-06-17 08:38 수정 2016-06-21 11:07
바이오스펙테이터 천승현 기자
의약품 시장에서 한동안 잊혀지는가 했던 리베이트가 또 이슈다. 한 다국적제약사의 리베이트 의혹 불똥이 한국다국적의약산업협회의 압수 수색으로 튀었다. 국내 중소제약사들을 중심으로 리베이트 사건이 간헐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제약업계에서는 한미약품 등의 신약 성과로 모처럼 훈풍이 불었던 국내 제약산업의 위상이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다.
한 제약사 최고경영자(CEO)는 “과거 숱하게 리베이트로 곤욕을 치렀던 대형제약사들이 연루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상당수 업체들은 클린 영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과거보다 많이 깨끗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영업현장에서 리베이트가 근절됐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약사들에 '리베이트'라는 단어는 엄청난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지난 몇 년간 의약품 리베이트에 대한 처벌 규정이 강화돼 리베이트로 연루되는 제약사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의료진 등에 검은 돈을 건네다 적발되면 대표이사가 형사처벌을 받거나,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거액의 과징금을 부과받을 수 있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리베이트 자금을 마련했다는 의심을 받고 국세청이 세무조사 카드를 꺼내들기도 한다.
리베이트 의약품은 판매금지 3개월 처분을 받고, 보험급여 삭제 처분으로 시장에서 퇴출될 수도 있다. 리베이트를 받은 의사들이 형사처벌을 받게 되면 해당 제약사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사실 여부를 떠나 특정 제약사가 리베이트로 검·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의료진들 사이에는 “그 제약사와 거래하다간 탈이 날 수도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처방이 줄어들고 결국 심각한 매출 손실로 이어지게 된다. 실제로 리베이트가 빌미가 돼 의사들의 집단 불매운동으로 처방실적이 곤두박질치는 사례도 있었다.
‘리베이트로 걸린 제약사는 장사를 접어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확산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 정도의 페널티라면 리베이트는 '심각한 범죄'라는 인식은 당연하게 들린다.
이쯤에서 ‘과연 불법 리베이트가 대체 무엇이길래 이렇게 소란일까’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불법 리베이트는 의약품 거래행위에서 발생하는 불법적인 거래 행위를 일컫는다.
물론 누가 봐도 과도한 금품 살포로 유통질서를 흐리는 행위는 철퇴를 맞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영업현장을 들여다보면 판촉행위의 연장선에서 불법 리베이트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욱 많다. 영업현장에서는 제약사간 과열 경쟁체제에서 돈을 한푼도 쓰지 않고 영업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영업사원이 의사들에 식사라도 대접하거나, 병의원에서 필요로 하는 비품을 제공하는 것은 기본적인 영업전략인데, 이마저도 불법과 합법의 경계에 놓일 때가 많다. 유사한 약을 판매하는 현실상 영업사원들은 의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같은 질병이라도 1~2개의 약만 처방하는 의사도 있고 5~6개를 처방하는 의사도 있기 때문이다.
영업사원들은 무엇보다 제약사 경영진이 영업사원들에 리베이트를 안줘도 영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목한다. 겉으로는 “절대 뒷돈을 줘서는 안된다”며 규정보다 엄격한 기준을 강요하면서 영업사원들에게 "목표 매출은 기필코 달성하라"는 경영진이 대다수다. 실적 목표를 달성해도 사채 이자처럼 목표치는 더욱 높아지는 현실이다.
영업본부장이나 영업소장들의 고민은 한결같다. “회사에서 돈은 못 쓰게 하는데, 돈을 안 쓰면 실적이 나오지 않으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고민이다. 의사들에 식사를 접대하다가 일정 규모를 넘어서면 영업사원이 자비로 해결해야 하는 구조다. "원장님, 여기서 더 드시면 안돼요"라고 말하면 과연 경영진이 칭찬할까.
경영진이 반복하는 “돈 안쓰고도 열심히 하면 매출은 따라오게 된다”는 논리는 영업현장에서는 ‘증세 없는 복지’처럼 허상같은 얘기다. 경쟁력이 탁월한 신약이 없는 국내제약사들은 더욱 그렇다. 모처럼 수출 대박을 터뜨리고도 전 직원들에 주기로 한 인센티브 중 영업사원들에게는 차등 지급하며 영업사원들간 경쟁을 부추기는 게 우리 제약사들의 민낯이다.
임기내 성과를 내야하는 CEO들은 깨끗한 영업을 하면서 실적도 내야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영업사원들에 팔만한 약을 가져다 주지 않으면서 실적만 주문하는 것은 행여라도 리베이트로 적발되면 영업사원들에 책임을 전가하겠다는 의도와 다름 없다. 실제로 한 제약사는 리베이트로 적발되자 영업사원들이 회사 자금을 횡령했다며 사기죄로 고소하며 꼬리자르기를 시도한 적도 있다.
경영진이 달라지지 않으면 현장은 바뀌는 게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리베이트도 주지 말고 목표는 꼭 달성해야 한다”라는 무책임한 주문보다는 영업사원들이 편안하게 영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책임감 있는 경영진의 자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