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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석의 신약연구史]백신, 소아마비 퇴치까지

입력 2019-06-25 16:40 수정 2019-06-25 16:40

남궁석 SLMS(Secret Lab of Mad Scientist) 대표

바이러스와의 전쟁④ 폴리오 바이러스와의 전쟁(하)

1930년대에 진행된 폴리오 바이러스 백신 개발이 실패한 이후, 1949년에 존 앤더스 등에 의해서 폴리오바이러스의 체외 배양이 가능해 진 다음부터 다시 폴리오 바이러스 백신 개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백신을 어떤 방식으로 개발해야 할까? 폴리오 바이러스 백신 개발을 위해서 제시된 방법 중 하나는 맥스 테일러가 황열병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한 방식처럼 원래 숙주가 아닌 환경에서 바이러스를 오래 배양하여 독성이 약화된 약독화된 바이러스(Attenuated live virus)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약독화 방식의 백신을 개발하는데 뛰어든 연구자들로는 힐러리 코프로우스키(Hilary Koprowski, 1916-2013), 알버트 사빈(Albert Sabin, 1906-1993) 등이었다. 약독화된 생 바이러스를 이용한 백신은 경구 투여가 가능하고, 실제 폴리오 바이러스가 감염되는 경로인 인두 및 장내 점막을 통하여 감염되어 점막 면역(Mucosal Immunity)을 유도하므로 좀 더 강력한 면역성을 보인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약독화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바이러스를 체외 배양 시스템에서 오랫동안 배양하고, 이의 독성을 동물에서 테스트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으므로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난 연재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폴리오 바이러스에 면역학적으로 구분되는 3종류의 서브타입이 있으므로 효과적인 백신을 만들기 위해서는 3종류의 폴리오 바이러스 서브타입에 대해서 모두 약독화된 바이러스를 얻어야만 되었으므로 백신으로 사용할 수 있는 3종류의 약독화 바이러스를 얻는 것은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장 소아마비에 대한 공포가 만연되어 있는 대중이나 그동안 소아마비 연구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던 소아마비 국립재단(National Foundation for Infantile Paralysis)은 좀 더 빠른 시일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얻기를 바랐다. 특히 “마치 오브 다임”(March of Dime)이라는 대중 대상의 모금활동으로 막대한 금액을 모금하고 있던 소아마비 국립재단 측에서는 재단에서 금전적인 지원을 받는 소아마비 연구자들이 백신 개발보다는 자신의 바이러스 연구에 더 흥미가 있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2차 대전 이후 소아마비의 발생 건수가 급증하면서 재단과 연구자간의 긴장은 높아갔다. 1952년 미국에서의 소아마비 발생 건수는 5만8,000건에 달했고, 이로 인한 사망은 3,145명에 이르렀다[1].

조너스 소크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사람이 바로 조나스 소크(Jonas Salk, 1914-1995)다. 그는 뉴욕대 의대를 졸업하고 전공의 과정을 마친 후, 1941년부터 B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발견한 미시건 대학의 토마스 프랜시스 주니어(Thomas Francis Jr, 1900-1969)의 연구실에서 연구하면서 바이러스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바이러스와의 전쟁 (2)’에서 기술한 것처럼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경우 바이러스를 포르말린에 의해서 불활성화하여 성공적으로 백신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졌고, 소크 역시 프랜시스의 연구실에서 이러한 바이러스 불활성화에 의한 백신 개발에 대한 경험을 쌓게 되었다.

소크는 1947년 33세의 나이로 피츠버그대학 의대에 임용되어 자신의 연구실을 차리게 되었다. 소크는 1949년 소아마비 국립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기존에 보고된 소아마비 바이러스의 3종의 서브타입에 대한 확인 연구를 수행하였다[2]. 소아마비 국립 재단의 지원을 받기 전에는 보잘것 없는 규모였던 소크의 연구실은 소아마비 국립 재단의 지원을 통하여 규모가 커졌으며 줄리어스 영그너(Julius Yougner, 1920-2017) 등과 같은 젊은 연구자를 고용하여 연구팀을 형성하였다. 소크의 연구는 새로운 연구라기보다는 기존의 연구를 확인하는 확인 연구에 가까운 연구였지만, 상당한 규모의 연구를 꼼꼼하게 수행하는 소크의 연구는 소아마비 국립재단에 좋은 인상을 주었다.

1951년 소크는 덴마크에서 열린 소아마비 학회에서 돌아오는 대서양 횡단 여객선 퀸 메리호 안에서 소아마비 국립재단의 회장이었던 바실 오코너(Basil O’Connor, 1892-1972)를 만났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변호사이자 그를 대리하여 소아마비 국립재단을 운영하던 바실 오코너는 조나스 소크라는 젊은 연구자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오코너는 재단에서 지원을 받는 다른 바이러스 연구자들이 신속한 백신 개발보다는 바이러스 자체의 연구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오코너는 소크의 목적지향적이고 저돌적인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소크는 1951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금액인 연 20만 달러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폴리오 바이러스 백신 개발에 나섰다. 소크는 다른 연구자들이 약독화된 바이러스를 이용하여 백신을 개발하려고 한 데 반하여, 그가 포스트닥을 수행한 프랜시스 주니어의 랩에서 경험한 인플루엔자 백신 개발 과정과 마찬가지로 포르말린을 이용한 불활성화 백신을 만들려고 했다. 이것은 1930년대에 이미 시도된 브로디의 폴리오 백신 개발 방법론과 유사하지만 차이라면 브로디의 백신은 바이러스가 감염된 원숭이의 척수 추출액(척수 조직에 존재하는 미엘린 베이직 단백질에 의한 자가면역반응에 의한 마비 위험성이 있는)을 직접 처리한 것인데 반하여 소크 연구팀의 백신은 원숭이의 신장 세포를 체외에서 배양하여 바이러스를 증식시킨 것이다.

소크 연구팀의 영그너는 원숭이 신장 세포를 트립신(Trypsin) 처리를 하여 분리된 세포에서 폴리오 바이러스를 감염시키면 폴리오 바이러스의 수율이 현저하게 증대된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는 폴리오 바이러스가 감염된 원숭이 세포의 pH가 변한다는 것에 착안하여 폴리오 바이러스가 감염된 배양 세포에서 바이러스가 어느정도 생산되었는지를 지시약의 색이 변하는 것으로 확인하는 테크닉을 만들었고[3], 이는 폴리오 바이러스의 대량 생산에 필수적인 기술이 되었다.

이렇게 백신 생산에 필요한 바이러스 대량 생산 기술을 확보한 소크 연구팀은 바이러스를 불활성화하는 프로토콜을 최적화하였다. 포르말린의 처리 농도를 높이고 시간을 늘일수록 바이러스의 불활성화 정도는 높아지겠지만, 반대로 백신으로써의 항체 유도능력은 떨어질 것이다. 소크 연구팀은 6일의 포르말린 처리를 통하면 1억 번의 투여분량에 살아있는 바이러스가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물론 이러한 것은 바이러스의 불활성화가 시간에 따라서 직선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추정에 따른 것이고 실제로의 실험적인 검증에 의거한 것은 아니었다)[4].

소크는 1952년부터 주로 장애아동과 지체 아동을 대상으로 하여 약 100여명의 아동을 대상으로 그의 불활성화된 백신을 주사하였다. 그 결과는 1953년 소크의 연구 결과는 JAMA에 출판되었고, 곧이어 매스미디어의 엄청난 관심을 받게 되었다[5]. 그러나 소크는 아직 개발 단계에 불과한 백신을 통하여 개인적인 명성을 누린다는 학계의 비판 역시 받게 되었다. 또한 소크의 불활성화 백신이 소아마비에 대한 완벽한 면역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비판 역시 지속되었다.

이러한 비판과 상관없이 소아마비 국립 재단에서는 약 150만명의 아동, 소크 자신과 그의 자식이 포함된 약 20만명의 지원자가 참여하는 대규모의 임상시험이 실시되었다. 여기에는 44만명의 백신 투여군, 21만명의 위약군, 그리고 120만명의 미 참여군이 관여되고, 이들의 폴리오 발생 여부를 관찰하는 시험이었다. 소크의 백신은 폴리오바이러스 타입 1에 대해서는 약 60-70%의 예방 효과가 있었고, 타입 2와 타입 3에 대해서는 90% 이상의 예방 효과가 있었다. 1955년 4월 12일,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10주기일에 소크의 폴리오 백신의 결과가 발표되었고, 폴리오 백신이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발표되었다[6]. 이 뉴스는 전세계적인 화제가 되었으며 소크는 단번에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남궁석의 신약연구史]백신, 소아마비 퇴치까지

▲그림 1 . 폴리오 백신 개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3인. 바실 오코너 (좌, Basil O’connor, , 1892-1972)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변호사로써 나중에 ‘마치 오브 다임’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소아마비 국립재단의 회장으로써 20세기 중반의 폴리오 연구 및 백신 개발의 지원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너스 소크 (Jonas Salk, 1914-1995)는 소아마비 국립재단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최초의 불활성화 폴리오 백신을 개발하였고, 소크의 이름은 소아마비 퇴치의 대명사가 되었다. 알버트 사빈 (Albert Sabin, 1906-1993)는 약독화한 생바이러스를 이용한 경구 투여 가능한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하였고, 경구 투여 가능한 소아마비 백신은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보급된 소아마비 백신이 되었다.

소크의 명성을 더욱 높인 것은 CBS의 방송에 출연하여 한 인터뷰에서 백신의 특허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답한 대답이었다. “특허를 가진 것은 아마 대중들이다. 태양에 특허를 낼 수 있을까?”(Well, the people I would say. There is no patent. Could you patent the sun ?”) 이러한 소크의 발언은 그가 스스로 특허의 출원을 포기하여 공익을 위하여 사용한 것으로 인식되어 소크의 명성을 더욱 더 높이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학자 제인 스미스의 주장에 의하면 백신 개발을 지원한 소아마비 국립 재단에서는 백신의 특허 가능성에 대해서 면밀히 검토했지만, 소크의 연구 이전에 선행 연구(브로디의 백신 연구, 폴리오 바이러스의 배양법) 등이 이미 공개된 상태였고, 소크가 한 것은 새로운 기술이나 발견을 한 것이라기보다는 기존에 알려진 방법들을 최적화하여 백신을 만든 것에 가깝기 때문에, 특허 취득이 어려울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특허를 출원하지 않은 쪽에 가깝다고[7]. 어쨌든 소아마비 국립 재단은 소크를 소아마비 퇴치의 상징적인 인물로 적극적으로 홍보하였고, 그는 소아마비 백신의 대명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크와 같이 연구한 영그너 등의 동료 연구자들의 기여는 거의 언급되지 못하였고, 거의 모든 주목은 소크에게 집중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같이 연구한 동료 연구팀과 소크와의 관계에 악영향을 미쳤다. 가령 소크의 연구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영그너가 2017년 사망하였을때 나온 그의 부고 기사에서도 소크가 혼자서 연구 업적을 독차지하고 대중의 주목을 받은 데에 대한 영그너 등의 좌절이 잘 기록되어 있다[8].

소크 백신의 등장 후 대중적으로 막강한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지게 된 소크는 1963년 샌디에이고 근교 라 호야(La Jolla)에 소크 연구소(Salk Institute for Biological Studies)라는 독립 연구소를 설립하게 되었고 소크 연구소는 현재까지도 생명과학 연구를 선도하는 중요한 연구기관으로 남아 있다.

어쨌든 소크의 백신이 1955년부터 도입된 이후부터 미국 내에서의 소아마비의 발생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백신 도입 이전인 1953년 미국에서의 소아마비의 발생 건수는 3만5,000건이었으나 백신의 대중 접종이 시작된 이후인 157년에는 5,600건으로 줄었고 1961년이 되자 고작 161건으로 줄었다.

[남궁석의 신약연구史]백신, 소아마비 퇴치까지

▲그림 2. 소크와 소아마비 국립재단은 소크의 백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홍보하기 위하여 소크의 아들과 가족들이 백신을 접종받는 것을 공개하기도 하였다 (좌상). 1955년 소크의 백신 임상 결과가 발표되고 소크는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소크와 같이 연구를 수행한 줄리어스 영그너 (Julius Yougner 우하, 오른쪽)와 같은 연구자들은 실제로 백신 개발 과정에서 결정적인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소크가 폴리오 백신의 개발자로 대중적인 명성을 얻는 사이에서 충분한 크레딧을 얻지 못하였다.

커터 사의 불량 백신에 의한 사고

그러나 소크의 백신이 아무런 문제없이 순조롭게 보급된 것은 아니었다. 1955년 소크 백신의 생산 라이센스를 얻어서 백신을 생산한 5개 회사중의 하나인 커터 래보라토리(The Cutter Laboratory)에서 생산된 백신에 살아 있는 바이러스가 함유된 채 백신으로 접종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커터 사의 백신을 접종받은 사람 중 4만명이 척수에는 이상이 나타나지 않은 부전성 회백수염(abortive polio)이 나타났으며, 51명에서는 소아마비 증상이 나타났으며 5명은 사망하였다. 백신에 의해서 폴리오 바이러스가 감염된 환자로부터 일어난 2차 감염에 의하여 113명의 소아마비 환자가 발생하였으며 여기서 다시 5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9].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났을까? 조사결과 세포 배양액에서 세포를 여과하여 바이러스를 정제하는 과정에서 생겼다. 커터 사에서는 원래의 소크가 개발한 공정에서 사용한 여과막과는 규격이 다른 여과막을 사용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세포 찌꺼기가 들어갔고, 이러한 세포 찌꺼기가 포름알데하이드에 의한 바이러스 불활성화를 방해하여 미세량의 생 바이러스가 백신에 남아있게 되었고, 이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이후 백신의 생산 기준에 대해서 정부의 엄격한 규제가 생기게 되었으며, 이러한 백신 생산에서의 공정상에서 생긴 문제 때문에 야기된 사고는 그 이후의 제약업계와 백신을 대하는 대중들의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의약품의 인가와 임상시험에 대한 규제가 극히 허술하였지만 이러한 사고는 의약품의 판매 인가에 있어서 정부 차원의 규제가 시급하다는 인식을 만들었으며, 그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에 의한 대규모적인 기형아 발생과 맞물려서 1962년 케푸버-해리스 개정안(Kafauver-Harris Amendment)이 도입되어 모든 약물에 대한 임상시험 및 의약품 시판에 FDA의 엄격한 규제가 따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알버트 사빈의 약독화 폴리오 백신

소크의 불활성화 백신이 미국 내에서 먼저 보급되기 시작하였지만, 약독화 백신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신시내티 대학의 알버트 사빈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은 약독화 백신의 연구를 계속했다. 이들은 불활성화 백신이 여러 번의 부스팅(Boosting)을 거쳐야 하는데 반하여 약독화된 살아있는 바이러스를 이용한 백신은 단 한번의 투여만으로 면역성을 부여한다는 강점을 부각했다. 또한 폴리오 바이러스의 정상적인 전파 경로인 경구 투여를 통하여 장을 통하여 전달되어 점막 면역(mucosal immunity)를 형성하는 약독화 백신이 주사를 통하여 접종되는 불활성화 백신보다 보다 완벽한 면역성을 형성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배설물을 통하여 주변에 전파되는 약독화된 바이러스에 의해서 백신을 접종받지 않은 주변에 대해서도 집단 면역을 형성한다는 것이 폴리오의 약독화 백신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거였다.

그러나 1955년부터 이미 소크의 불활성화 백신이 대규모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많은 대상자들이 폴리오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이미 갖게 되기 시작한 상황에서 약독화 백신에 대한 대규모적인 임상시험을 미국에서 실시하는 것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사빈은 해외에서의 임상시험을 통하여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사빈의 백신은 1958년 싱가포르와 체코에서 테스트되었으며, 특별한 안전성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가장 큰 규모로 사빈의 약독화 백신이 테스트된 곳은 소련이었다. 소련의 바이러스학자인 미하일 쿠마코프(Mikhail Chumakov) 에 의해 주도된 소련에서의 사빈 백신의 임상시험은 무려 1,500만명을 대상으로 실시되었고, 이를 통하여 사빈의 경구 투여 백신의 안전성과 효과가 입증되었다.

이러한 해외에서의 임상시험 결과에 힘입어 1961년 사빈의 경구 투여 백신은 미국에서 사용이 허가되었고, 1회 경구 투여만으로 면역성이 부여된다는 간편함 때문에 1960년대 중반이 되면 미국 내에서도 경구 투여 약독화 백신이 불활성 백신을 제치고 주된 백신이 되었다.

폴리오 백신의 폭넓은 보급에 따라서 폴리오의 발생 건수는 점점 줄어왔으며, 1994년 미주 대륙에서 폴리오의 박멸이 선언되었다. 2017년 전세계적으로 야생 폴리오 바이러스에 의한 폴리오 발생 건수는 총 22건으로 세계적으로도 거의 박멸에 가깝게 되었다.

이렇게 폴리오 백신에 의해서 야생 상태의 폴리오 바이러스의 감염이 줄어들면서 오히려 극히 적은 빈도로 발생하는 백신에 의한 폴리오 발생에 대해서 관심이 집중되게 되었다. 사빈의 약독화 바이러스는 투여 이후 수 일 내에 대변으로 배출되게 되는데, 대변으로 배출된 바이러스는 애초에 투여된 바이러스에 비해서 신경독성이 높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약독화 바이러스는 바이러스를 오랜 기간동안 원래의 숙주가 아닌 다른 세포시스템에서 배양하면서 축적된 돌연변이 때문에 독성을 잃는다. 그러나 이러한 약독화 바이러스가 원래의 숙주에 감염되면 낮은 빈도로 다시 복귀 돌연변이(Reversion mutation)을 형성하여 다시 신경독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 보고되었다[10]. 1961년부터 1989년까지 미국 내에서 연간 평균적으로 9건 정도의 백신 유래의 소아마비가 보고되었는데, 이것은 백신 290만건당 1건 정도의 발생 빈도이다[11]. 이전처럼 일년에 수만 건의 소아마비가 발생하는 상황에서는 이 정도의 리스크는 감수할 만한 리스크였겠지만, 1979년 이후 미국 내에서 야생형 폴리오 바이러스에 의한 소아마비가 발생하지 않고, 발생하는 몇 건 정도의 소아마비가 백신에 의한 것일 정도로 소아마비의 발생 빈도가 낮아진 상황에서는 백신에 의한 이익보다 리스크가 더 큰 상황이 된 셈이고, 2000년을 기점으로 미국에서는 소아마비 백신은 불활성 바이러스에 의한 백신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1999년 백신에 의한 폴리오 바이러스 발생이 보고된 이후 미국 내에서는 더 이상 소아마비의 보고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소크와 사빈을 중심으로 개발된 불활성 바이러스에 의한 백신과 약독화 경구 백신은 20세기 중반 서구사회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존재였던 소아마비의 퇴치를 가능케 하였다. 소아마비의 퇴치 과정은 단순한 기초의학의 발전을 넘어서 질병의 퇴치에 사회의 여러 구성원(연구자, 자선 재단, 정부, 제약회사) 들의 복잡한 관계가 어떻게 관여하는지를 잘 보여준 예라고 하겠다. 다음 연재에서는 20세기 후반에 가장 대중적인 관심과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킨 바이러스 매개 질병인 후천성면역결핍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도록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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